
얼마전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신입 분의 글을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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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입사 6개월 차의 신입인데, 일 자체는 의미 있고 배우는 것도 많지만 일이 너무 많다고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업무관리를 못 해서 그런 건지, 원래 과한 건지 구분이 안 된다고요. 스타트업이니까 그냥 감내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저 역시 조직이 잘 갖춰지지 않은 작은 기업에서 처음 일을 배웠으니 그때 생각이 났습니다. 조직의 규모가 크고 내부 체계가 좀더 견고하다면 신입도 좀더 빨리 업무에 적응할 수 있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신입들은 비슷한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어요.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뭔가 찜찜할테죠. 오늘 할일을 다 한게 맞나? 분명히 열심히 했는데, 잘 한 건지 모르겠고. 다음 날 출근하면 또 새로운 일이 쌓여있고, 어제 못 끝낸 것도 남아있고. 그 상태가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나 지금 너무 많은걸 하고 있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다는 말을 꺼내기도 쉽지 않아요. 신입이 벌써 힘들다고 하면 어떻게 보일까 싶고, 나만 못 따라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일이 많다’는 말에 주변 반응은 보통 두 갈래로 나뉩니다. “스타트업이 다 그렇지 뭐” 아니면 “업무관리가 안 되는 거 아냐?“로요. 그런데 이 두 반응 중 하나를 택하는 것 자체가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더 먼저 해봐야 할 질문은 따로 있거든요.
먼저 꺼내놓는 것부터 Link to heading
병원에 가면 의사가 먼저 묻죠. “어디가 불편하세요?” 증상을 말로 꺼내는 것 자체가 진단의 시작입니다. 업무도 비슷해요.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먼저 꺼내보는 과정이 없으면, 많은 건지 아닌지조차 판단이 안 됩니다.
머릿속에만 있는 일은 실제보다 항상 더 많아 보이는데, 심리학에서는 이걸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라고 부릅니다. 완료되지 않은 일은 뇌가 계속 기억 속에 활성화해두는 경향이 있다는 건데요. 처리하지 않은 일이 많을수록 뇌는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곱씹게 됩니다. 그래서 퇴근 후에도, 밥 먹을 때도, 자려고 누웠을 때도 일 생각이 계속 따라오는 거예요. 실제로 해야 할 일보다 훨씬 더 많이 일들이 머리 속을 차지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지금 내가 하는 일의 전체 목록을 눈앞에 꺼내놓는 겁니다. 최소 1주일에서 10일 정도의 업무들을 아주 작은 것도 다 포함해서요. 이메일 답장, 반복 보고, 정기 미팅, 리서치, 실행 업무까지 전부 나열해보기. 그렇게 해야 비로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일의 위치를 파악하기 Link to heading
목록을 정리했다면 각 일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보는 겁니다. 이 일이 전체 흐름에서 어떤 단계의 일인지, 누구에게 영향을 주는 일인지, 지금 안 해도 되는 일인지. 이걸 파악하면 우선순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회 초년생이 특히 어렵다고 느끼는 부분은 여기인 경우가 많아요. 일을 받을 때 “이거 부탁드려요"라는 말만 있고,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다 보니 받은 일이 전부 비슷하게 급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 중요한 것 같고, 다 빨리 해야 할 것 같아요. 그 상태에서는 당연히 지칩니다.
이 맥락을 파악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혼자 고민하는 게 아니라 물어보는 겁니다. “이 일들 중 지금 가장 먼저 챙겨야 할 게 뭔가요?“라고요. 이게 모르는 걸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예요. 우선순위를 확인하고 움직이는 사람이 더 효율적으로 일하고, 결과적으로 더 신뢰를 얻습니다. 상사 입장에서는 “이 친구가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구나"라는 인상을 주거든요.
나의 힘듦에 대해 얼마나 솔직해야할까 Link to heading
소통하고 싶다는 마음과, 실제로 얼마나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지는 꽤 다른 문제입니다. “요즘 좀 힘들어요"는 소통이 아니라 신호일 뿐이에요. 진짜 소통은 “어떤 일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데, 이게 맞는 속도인지 모르겠어요"처럼 구체적인 내용을 공유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처음 일을 시작하면 이게 특히 어렵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안 될 것 같고, 힘들다고 하면 약해 보일 것 같고, 질문을 너무 많이 하면 눈치 없어 보일 것 같은 느낌. 그 불안이 쌓이다 보면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게 되고, 혼자 껴안고 버티게 됩니다.
스타트업이라면 더 그렇죠. 체계화된 프로세스나 내부 기준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의 상황을 모른 채로 지나가게 됩니다. 상사 입장에서도 신입이 어느 부분을 어려워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말하지 않으면요.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했을 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는 게 당연해요. 하지만 그 불안이 있더라도, 말하는 방식은 조율할 수 있습니다.
힘들다는 감정에 집중하기 보단 상황을 같이 공유하기 Link to heading
힘들다는 감정을 꺼내기 전에, 먼저 업무 상황을 같이 들여다보자고 제안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일을 잘하고 싶은데 아직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다, 주어지는 일들의 우선순위 설정이나 시간 배분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 혼자는 안 될 것 같으니 상의를 좀 해보고 싶다.”
이렇게 시작하면, 상대도 방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같이 문제를 보게 됩니다. ‘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해결해야 할 것’이 되거든요.
거기서 1주일치 혹은 10일치 업무를 같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면, 하루에 실제로 할 수 있는 양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부분이 병목인지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 과정에서 업무량이 실제로 과한 건지, 아니면 내가 조율하는 방식에서 개선할 점이 있는 건지가 같이 보이기 시작해요.
물론 이 과정이 끝나고 나서도 업무량이 진짜 과하다고 결론이 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그걸 기반으로 다음 대화를 할 수 있어요. 적어도 그 대화가 감정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하게 됩니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업무 범위를 넓히고 있진 않을까 Link to heading
그 스레드 글에 이런 말도 있었습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주는 일을 해내고자 하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업무가 과한 이유가 외부에만 있지 않다는 거죠. 처음 일을 시작하면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강할 수 밖에 없는데 그 마음이 은근히 일의 범위를 넓히기도 합니다. 요청받은 것보다 더 꼼꼼하게, 더 완성도 있게, 더 빨리 하려고 하다 보면 본인이 스스로 기준을 높이게 되거든요. 상사가 80점을 원하는데 혼자 100점을 목표로 달리고 있는 상황. 에너지는 훨씬 더 쓰는데, 정작 중요한 게 뭔지는 점점 흐려집니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분명히 좋은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방향이 없으면, 에너지는 많이 쓰는데 결과가 잘 안 보이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지치고, 그 지침이 업무량 탓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그래서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어떤 일을 얼만큼 잘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은 혼자 정하는 게 아니라 함께 확인해야하구요. 상사가 기대하는 수준이 뭔지, 지금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를 물어보는 것. 그게 잘하고 싶은 마음을 제대로 쓰는 방법입니다.
꺼내볼 수 있는 질문들 Link to heading
평소 업무량이 많다고 느껴진다면 먼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세요.
-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전체 목록을 꺼내본 적 있나? 머릿속에서만 굴리고 있으면 실제보다 항상 많아 보인다.
- 각 일이 전체 흐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고 있을까? 맥락이 보이면 우선순위가 보인다.
- 나는 내가 하루에 실제로 할 수 있는 업무량을 알고 있을까? 이걸 모르면 많은 건지 아닌지 판단 자체가 안 된다.
- 상사나 동료에게 ‘얼마나’ 구체적으로 말했었나? 감정이 아니라 상황을 공유하기.
-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업무 범위를 스스로 넓히고 있진 않나? 기준 없는 ‘잘하고 싶음’은 에너지를 분산시킨다.
무조건 버티는 게 좋다는 얘기도 아니고, 바로 그만두는 게 낫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다만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먼저 파악하는 게, 어떤 결정을 하든 더 낫다고 생각해요. 꺼내보고, 들여다보고, 그 다음을 생각하는 것. 그 순서가 중요합니다.
처음 일을 시작하면 모든 게 서툴고, 내가 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게 원래 이렇게 힘든 건지도 모르겠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이 꽤 길기도 해요. 근데 그게 나만 그런건 아닙니다. 소통도, 우선순위 조율도, 기준을 잡는 것도 전부 연습이 필요한 일입니다. 경험이 오래된 상사나 팀장들도 늘 연습하는 일이예요. 익숙해지기 어려운 게 당연하니까, 조금씩 시도해보는 수밖엔 없습니다.
코드는 디버깅하면서 마음은 방치하고 있진 않나요? 에러 로그 읽듯 나의 마음과 감정도 살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디버깅 마인드>로 나의 마음을 읽고 살피는 시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디버깅 마인드>는 모비인사이드에 기고하는 시리즈형 컨텐츠로 스타트업 구성원, 1인 메이커, 프리랜서들이 일과 삶 사이에서 겪는 마음들을 디버깅하는 심리학 콘텐츠입니다.
글 우주 threads X(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