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은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는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30년쯤은, 익숙한 이 곳에서 그럭저럭 삶을 유지할 수 있는데. 지구를 구할 수 있다는 그 무거운 희망을 짊어질 이유가 없잖아요.
하지만 지구를 구할 단서에 가장 가까이 있던 과학자였기에, 그는 편도행이 확정된 우주선 헤일메리호에 탑승합니다. 또 다른 이유도 붙었어요. 아내도 없고, 가족도 없고, 반려동물도 없는 사람. 남겨두고 떠나야 할 것이 없는 사람.
우리가 집이라고 믿는 곳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하는데, 그의 집인 지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 순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 하나 — 이게 집이야? 어??
내몰린다는 것 Link to heading
혼자 일하기 시작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비슷한 감각일겁니다.
완전히 자발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하기 애매한 출발. 상황이 그렇게 됐거나, 더 이상 거기 있을 수 없었거나,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은 느낌.
전에 있었던 회사, 팀, 조직이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을 줬던 곳이었나 돌아보면, 꼭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돌아갈 곳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사실은 나를 소모하던 곳일 수도 있죠. 그렇다면 거기서 나온 게 상실일까요, 아니면 처음부터 내 자리가 아니었던 걸 뒤늦게 알아채는 걸까요.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의 손실 회피(loss aversion)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같은 크기의 이익보다 손실을 약 두 배 더 크게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별로 좋지 않은 것도 ‘잃을까봐’ 붙들고 있어요. 별로였던 직장, 맞지 않았던 역할, 소진시키던 관계들까지도. 현재 상태를 바꾸는 것 자체를 손실로 인식(현상 유지 편향)하기 때문에 우린 자주 어떤 상태나 장소에 머무릅니다.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거기 있게 되는 것. 익숙한 게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계속 거기 있어야할 것같은 기분.
그러니 ‘내몰렸다’는 감각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잃을 게 없다는 말의 두 얼굴 Link to heading
인생이란게 어차피 돌아갈 수 없는 편도 여행이니, 우린 어쩌면 각자의 헤일메리호에 탑승 중입니다. 집이라 여겨지던 소속을 떠나 혼자 일하고 있다면 그 느낌이 좀더 현실적으로 와닿을터.
이전의 직함과 쌓아온 경력, 익숙했던 방식이 갑자기 기준이 되지 않는 순간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혼자 일한다는 건 아무도 내 이전을 알아주지 않는 환경에 놓이는 건데, 그 당혹감은 겪어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되서야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합니다. 잃을 게 없는 상태가 되면 오히려 가장 순수하게 판단할 수 있는 때가 되요. 퇴사 직후, 창업 초기, 실패한 직후- 이런 상황에서 매몰 비용(sunk cost)에 얽매이지 않을 때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비교할 ‘이전’이 없어지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해야합니다. 달리 방법이 없어요.
그레이스도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했어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단서를 찾아 다시 조금씩 출발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온전히 볼 수 있었고, 그 우주 한복판에서 예상치 못한 존재를 만나게 됩니다.
나를 알아보는 단 한명 Link to heading
멘토일 수도 있고, 투자자일 수도 있고, 그냥 아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역할은 중요하지 않아요. 언어가 달라도, 배경이 달라도, ‘나는 네가 뭘 하는지 알고, 그건 의미 있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는 누군가.
혼자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건 행운입니다. 앨버트 반두라의 자기효능감(self-efficacy) 연구에 따르면, 내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은 능력 자체보다 그 믿음을 지지해주는 누군가의 존재에 더 크게 좌우된다고합니다. 용기는 DNA가 아니라 ‘누군가’때문에 생긴다는 영화의 대사가 더욱 마음을 파고듭니다.
단지 피드백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알아봐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때문에 우린 더 먼 곳으로 갈 용기가 생깁니다.
집은 좌표가 아니다 Link to heading
심리학자 매슬로의 욕구 위계에서 소속감은 생리적 필요나 안전보다 한 단계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소속감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에서 와요.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어떤 의미를 공유하느냐.’
사업을 시작하거나, 프리랜서가 되거나,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 우리의 인생처럼 이것도 편도 티켓을 끊는 일입니다. 돌아갈 이전 버전의 나는 없어요. 근데 그게 꼭 무서운 일만은 아닙니다. 잃을 게 없다는 건 — 지금부터 쌓이는 게 전부 내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각자의 헤일메리를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내몰렸든, 어쩌다 여기까지 왔든, 나만의 오롯한 선택으로 핸들을 쥐는 건 바로 지금부터입니다. 가야할 이유가 있는 그 곳이, 이유가 되는 누군가가 있는 곳이 우리가 가야할 곳입니다. 우리는 지금 집으로 가는 길이에요. 집에 가고 있습니다.
혹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당신도, 오래 오래 생각해도 좋아요. 지금 어느 곳에 도착해있든,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코드는 디버깅하면서 마음은 방치하고 있진 않나요? 에러 로그 읽듯 나의 마음과 감정도 살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디버깅 마인드>로 나의 마음을 읽고 살피는 시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디버깅 마인드>는 모비인사이드에 기고하는 시리즈형 컨텐츠로 스타트업 구성원, 1인 메이커, 프리랜서들이 일과 삶 사이에서 겪는 마음들을 디버깅하는 심리학 콘텐츠입니다.
글 우주 threads X(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