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출시해도 될까요?”
프로덕트의 베타 버전을 2개월째 손보고 있을 때, 멘토에게 물었습니다. 그분은 웃으면서 제게 다시 물었습니다. “우대표는 언제쯤이면 완벽하다고 생각해?”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완벽한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가 없었거든요. 그저 “아직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만 있었습니다.
완벽주의는 높은 기준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효율적으로 자신을 소진시킵니다. 저 역시 그걸 꽤 오랜 시간 체감했어요. 사실, 아직도 그 과정에서 고군분투하는 중입니다. <디버깅 마인드> 시리즈는 ‘완벽주의’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혼자 일할 때 드러난 완벽주의의 진짜 얼굴 Link to heading
회사 다닐 때는 제가 완벽주의자 성향인 줄 몰랐습니다. 회사에는 안전장치가 있었거든요.
마감 기한, 동료 리뷰, 책임 분담, 사업부와 QA팀같은 프로세스. 이런 것들이 “완벽함"을 대신 담보했고, 저의 완벽주의는 “치밀하고 꼼꼼한 직원"이라는 칭찬으로 포장됐습니다. 하지만 혼자 일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어요.
마감이 사라지면서
“다음 주 월요일 스프린트 리뷰”(회사) vs “완벽해지면 출시하지 뭐”(혼자)
저는 여러개 프로젝트를 혼자 만들고 운영중인데요. 그중 특히 힘을 쏟는 한개 프로젝트를 몇달동안 손봤습니다. 매주 “다음 주엔 출시하고 세일즈에 나서자"라고 했지만, 매번 “아직 부족해"가 반복됐습니다. 혼자니까 내가 나의 PM이자 가장 가혹한 비평가가 되었습니다.
동료의 “괜찮아"가 사라지면서
회사에서는 동료나 직속 상사가 “괜찮은데요?”, “더 수정할거 없어요"하면 “이 정도면 되는구나” 확신이 생겼습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어요. 혼자 일하면 스스로에게 “이 정도면 됐어"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그게 정말 어렵더라고요. 같은 기능을 서너 번 갈아엎었습니다. “너무 복잡해, 다시” → “너무 단순해, 다시” → “첫 번째가 나았나, 다시”. 객관적 피드백없이 계속 흔들렸습니다.
모든 역할이 내 책임이 되면서
회사에서는 책임을 나눌 수 있었어요. 디자인 별로면 디자이너 탓, 버그 나면 QA팀 탓. 마케팅 안되면 의사결정자의 고집이나 대행사 탓. (저는 마케팅팀이었습니다.)
혼자는? 기획, 디자인, 개발, 마케팅, CS, 인프라… 모든 영역에서 실수를 줄이려다 보니 완전히 소진됐어요. “기획자로서만 완벽하면 되는 게” 아니라 “개발자로서, 디자이너로서, 마케터로서도 실수가 없어야” 했으니까요.
비교 대상이 ‘전체 시장’이 되면서
회사에서는 같은 부서 내 팀이나, 다른 회사와 비교했습니다. 혼자 일하거나 소규모의 팀으로 일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스레드와 트위터에 보이는 성공한 인디 메이커, ProductHunt의 제품들, “삼일만에 만들어서 바로 매출 100만원 찍었어요” 같은 이야기들. 고난과 방황이 생략된 성공의 단면과 나를 비교하게 됩니다. 당연히 지금의 나는 항상 “부족해” 보입니다. 조바심도 나고요.
“충분히 좋음"의 기준을 잃어버리면서
회사에는 암묵적 기준이 있었어요. 혼자 일하면 그 기준점이 사라집니다. “이 정도면 좋은 거지?” 구체적 기준 없이 추상적 “완벽함"만 쫓거나 이미 시행착오를 겪고 성장중인 경쟁사와 비교하다보면, 어느새 ‘기준’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가 됐습니다.

깨닫지 못했던 완벽주의 Link to heading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제가 완벽주의자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나는 그냥 퀄리티를 중시하는 거야” “이 정도 기준은 당연한 거 아냐?”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의 완벽주의를 “높은 기준"이라고 합리화합니다.
멘토가 물었어요. “이렇게 만들고도 자신있게 세일즈를 못하는건, 정말 제품이 부족해서야? 아니면 부족하다고 느끼는 네 기준 때문이야?” 이 질문에 대해서도, 전 대답을 못 했습니다. 제품은 이미 3개월 전부터 더 적극적인 세일즈를 해도 되는 상태였거든요. 저를 막은건 프로덕트의 기능적 문제가 아니라 “이 정도로 세상에 내놓아도 괜찮을까?“라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완벽주의는 품질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보호 메커니즘일 수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으면 내놓지 않겠다는 신념은 ‘비판받을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혼자 일하면 이런 메커니즘이 더 강해지기 쉽습니다. 회사라는 안전망이 없으니, 실패가 곧 나의 실패, 내 가치의 증명처럼 느껴지거든요.
완벽주의의 진짜 얼굴 Link to heading
완벽주의자들은 스스로를 “꼼꼼한 사람” “디테일을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완벽주의는 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자 토마스 그린스폰(Thomas Greenspon)은 완벽주의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실수나 결함이 있으면 자신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믿는 신념 체계”
즉, 완벽주의의 핵심은 ‘높은 기준’에 있지 않고, ‘조건부 자기 수용’에 있습니다. “이 코드가 완벽해야 내가 좋은 개발자다.”, “이 글이 완벽해야 내가 괜찮은 작가다.”, “이 제품이 완벽해야 내가 성공할 자격이 있다.” 이렇게 일의 완성도와 자기 가치를 동일시하는 순간, 모든 작업은 자존감의 시험대가 됩니다.
완벽주의는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Link to heading
완벽주의는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다고 알려져있어요.
“시험 잘 봤구나, 역시 우리 애는 똑똑해”, “이번엔 왜 1등 못 했어? 더 열심히 해야지” 이런 식으로 사랑과 인정이 성취에 대한 조건부로 주어지는 경험들. 많이 하셨을겁니다. 저 역시 부모님과 친척들의 이런 대화를 수시로 들으며 자랐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어른들은 이런 대화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잘 몰랐을겁니다. 그들에게 최선인 방식으로 아이들을 대했을테니, 이제와서 그 분들을 탓하진 맙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는 배우게됩니다. ‘내가 완벽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요.
형제자매나 반 친구들과의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자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잘하는데 너는 왜 못해?” 같은 메시지들이 쌓이면서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신념이 뿌리내립니다. 중요한 순간의 실패나 초기의 실패가 큰 결과로 이어졌던 경험도 완벽주의를 강화합니다. “실수하면 끝이야"라는 믿음이 생기는 거죠.
완벽주의는 번아웃으로 향합니다 Link to heading
크게 보면 다섯 단계를 거칩니다. 나에게 해당하는 단계가 있나요? 지금 번아웃을 향해 달려가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1단계: 비현실적 기준 설정 Link to heading
“첫 버전부터 완벽해야 해”, “버그가 없어야 해”
개발을 배워 직접하는 지금으로선, 이 말이 얼마나 황당한 말인지 압니다. 저는 어떤 프로젝트를 출시하기 전에 나름대로 촘촘한 QA와 테스트 케이스를 만들었습니다. 다 만들고 나니 또 생각나는 게 있더라고요. 사용자들로부터 접수되는 불편함과 니즈도 넘쳤습니다. 모든 것을 해결한다음 다음 단계로 가겠다는 달성 불가능한 기준을 세우는 순간,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2단계: 만성적 스트레스 상태 Link to heading
완벽주의자들은 “아직 충분하지 않아"라는 생각으로 코르티솔이 계속 분비됩니다. 하버드 의대 연구에 따르면 만성적 코르티솔은 해마와 전전두엽 기능을 저하시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완벽을 추구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으면 실제 퍼포먼스는 떨어져요. 저는 꿈에서도 가격 정책을 고민하거나 UI를 고민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더 피곤했습니다.
3단계: 회피와 지연 Link to heading
“완벽하게 못 할 거면 아예 안 하는 게 나아.”
심리학에서는 이를 회피적 완벽주의라고 합니다. 편도체의 공포 반응이 전전두엽의 실행 기능을 마비시키는 거예요. 저는 가볍게 아이디어로 시작한 제품을 2주 동안 고치면서 온갖 기능을 넣으려다가 결국 배포하지 못한 적도 여러 번입니다.
4단계: 정서적 소진 Link to heading
계속된 긴장과 자기 비판으로 감정 조절 능력이 떨어집니다. 작은 피드백에 과민하게 반응하고, 더 진행되면 감정이 무뎌져요. 저는 어느 순간 만들고 있는 프로덕트의 대시보드를 보는 게 싫어지기도 했습니다. 유저가 늘어나도 “아직 부족한 기능이 너무 많은데"라는 생각뿐이었죠.
5단계: 완전한 번아웃 Link to heading
정서적 고갈과 냉소, 거리두기, 성취감 저하. 번아웃은 이런 증상으로 똬리를 틉니다. 뇌 영상 연구에 따르면 편도체는 비대해지고 전전두엽은 얇아집니다. 저는 작년 여름, 2주 동안 컴퓨터를 켜지도 못했습니다. 켜려고 하면 머리가 아프거나 속이 메스꺼웠어요. 몸이 먼저 거부한 거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있나요.
회사를 나와 스타트업 멤버, 인디개발자,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나를 가로막고 있는게 ‘완벽주의’가 아닐까라고 생각 해보신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완벽주의와 완벽주의가 번아웃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제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디버깅 마인드>의 다음 편은 완벽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다뤄보려고 합니다.
뇌를 다시 훈련하는 일상의 루틴과, 실천 가능한 체크리스트, 1인 메이커에게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들이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익히는 법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코드는 디버깅하면서 마음은 방치하고 있진 않나요? 에러 로그 읽듯 나의 마음과 감정도 살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디버깅 마인드>로 나의 마음을 읽고 살피는 시간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디버깅 마인드>는 모비인사이드에 기고하는 시리즈형 컨텐츠로 스타트업 구성원, 1인 메이커, 프리랜서들이 일과 삶 사이에서 겪는 마음들을 디버깅하는 심리학 콘텐츠입니다.
글 우주 threads X(twitter)